[초단편] 농담(濃淡)
2026.02.21 19:47
‘또롱.’
오후의 나른한 공기를 찢는 놋쇠 방울 소리. 내 아틀리에의 유일한 방문객 알림이자, 십중팔구는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이나 택배기사를 위한 소음이었다. 붓질을 멈추고 찌뿌둥한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문틈으로 하얀 지팡이가 먼저, 공간을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지팡이의 주인인 한 남자. 아, 그 남자. 동네를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앞을 못 보면서도 길을 찾는 데는 GPS라도 달린 듯 확신에 차 있던 그 걸음걸이가 오늘은 왠지 머뭇거렸다.
“저… 그림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몹시 수줍지만, 어딘가 단단한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 화실 벽은 물감을 토해내듯 강렬한 색채와 광적인 형태의 유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오직 눈으로 보고, 눈으로 탐닉하고, 눈으로 평가받는 세계. 이 세계의 언어를, 눈을 감은 사람에게 어떻게 통역한단 말인가.
“인터넷에서 선생님 화실 소개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가두는 마법사’라고….”
“푸흡!”
나도 모르게 뿜었다. 얼굴이 터질 듯 화끈거렸다. 몇 년 전, 홍보 업체에 맡겼더니 저런 오글거리는 문구를 박아놓은 것이었다. 제발 지워달라고 했더니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바람에 그냥 뒀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이야.
“아, 그거… 업체가 좀 과장을… 제가 마법사면 지금 로또 번호나 그리고 있겠죠. 하하.”
어색한 농담을 던지며 쩔쩔매는 내게, 그가 피식 웃으며 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고무판, 뭉툭한 송곳 같은 ‘점필’, 그리고 두꺼운 도화지였다. 그가 내민 도화지를 만져보자, 오톨도톨한 점선들이 손끝에 걸렸다. 서툴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집과 나무 스케치였다. 옆에는 꼬물꼬물한 점들로 고양이 비슷한 형체도 있었다.
“이렇게 판 위에 종이를 올리고 점필로 꾹꾹 누르면, 뒷면에 그림이 돋아나요. 손으로 세상을 만지듯, 제 그림도 만져보고 싶어서요.”
순간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했다. ‘그린다’는 행위를 시각에만 가둬놓았던 나의 오만이 와르르 무너졌다. 젠장, 재밌겠는데? 호기심이 미친 듯이 동했다. 나는 그에게서 판과 점필을 빼앗듯 받아 들고는, 눈앞의 그를 ‘그리기’ 시작했다. 붓 대신 송곳을 쥐니 영 어색했지만, 십수 년간 놀려온 손의 감각이 어디 가랴. 손끝의 압력에 집중하며 그의 단단한 어깨와 부드러운 머리칼의 질감을 종이에 새겼다.
“자, 만져보세요.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종이를 뒤집어, 마치 처음 만나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돋아난 선들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멈칫, 하더니 이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림과 자신을 번갈아 ‘만져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떠세요? 실물보다 좀 잘생기게 그려드렸습니다만.”
“…이게 저군요.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그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이 예측 불가능한 수업이 내게도 엄청난 도전이자 선물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우리의 수업은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나는 ‘보여주는’ 대신 ‘느끼게’ 하는 법을 훈련했다. 사과를 그릴 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 한 손에 묵직하게 감기는 무게감, 꼭지의 까슬까슬한 저항감” 같은 온갖 감각적 언어를 총동원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따라 점필을 움직였고, 그의 손끝에서는 곧 군침 도는 사과가 ‘열렸다’.
“선생님, 이 사과는 빨간색인가요, 초록색인가요?”
“음… 아주 잘 익어서,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터질 것 같은 ‘새빨간’ 색이죠.”
“아! 그럼 점을 좀 더 촘촘하고 강하게 찍어서, 아주 진한 빨강을 표현해 봐야겠네요.”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색’의 추상성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보았던 몇 가지 원색들-빨강, 파랑, 노랑-을 기억의 파편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선생님, 노을은 어떤 색이죠? 빨간색하고는 다르겠지요?”
“아… 그건 말이죠… 따끈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을 때의 온기 같은 주황색이… 하루의 열기가 식어갈 때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는 느낌 같은 보라색과 서서히 섞이는… 그런 색이에요.”
“…더 어렵네요, 선생님.”
나의 현란한 비유는 그의 상상력을 안드로메다로 보낼 뿐이었다. 며칠을 끙끙 앓던 내게 불현듯 하나의 아이디어가 스쳤다. 마침 화실 구석에서 잠자던 나의 고양이 ‘누룽지’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다 먹물 그릇을 엎지른 덕분이었다.
“아! 수묵화!”
“네? 갑자기 그건 왜…”
“선생님은 빛과 어둠은 감각으로 느끼시죠? 그렇다면 답은 수묵화입니다! 흰 종이는 빛, 검은 먹은 어둠. 먹의 농담(濃淡)으로 빛의 세기와 그림자의 깊이를 표현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색은 결국 빛의 장난이니까요!”
그의 얼굴에 ‘이 사람이 드디어 미쳤나’ 하는 표정이 스쳤다.
“그림이 온통 시꺼멓게 되는 거 아닐까요?”
“천만에!”
나는 누룽지가 엎지른 먹물 자국을 가리키며 외쳤다.
“보세요! 진한 부분은 칠흑 같은 밤, 옅게 번진 부분은 새벽의 안개 같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이제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두 가지 색, 빛과 어둠으로 그림을 그리게 될 겁니다!”
그날부터 나의 혹독한, 그러나 즐거운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 한 방울의 차이로 칠흑 같은 검정부터 안개 같은 회색까지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쳤다. 그의 손가락은 점점 더 예민한 저울이 되어갔다. 실패한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갈수록,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빛과 어둠은 더욱 정교하고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먹의 농도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어느 날, 나는 말했다.
“자, 이제 제 모습을 그려보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들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소리와, 체취와, 공간의 기척만으로 그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붓이 종이를 스치는 동안, 나는 발가벗겨진 채 영혼을 스캔 당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붓을 내려놓았다.
“어때요? 마법사처럼 나왔나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헙 들이마셨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거기에는 사진보다 더 나를 닮은 내가 있었다. 단순히 이목구비가 비슷한 차원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작업할 때의 오랜 버릇이었다. 은은한 먹으로 표현된 눈매에는 학생을 바라볼 때의 따스함이, 굳게 다문 입가에는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의 고집스러운 열정과 외로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는 눈으로 본 적 없는 나의 내면을, 나의 영혼을 통째로 끄집어내 종이 위에 펼쳐놓은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건… 반칙인데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내 목소리의 떨림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 눈에는 선생님이 늘 그렇게 보였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빛과, 가장 깊은 그림자를 함께 품고 있는 분으로요.”
그 순간, 아틀리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그의 그림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흰 종이 위의 먹빛 초상화는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는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본질을 더 깊이 만지고, 느끼고,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자신이 만진 나의 모습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낡은 화실에 갇혀 색을 잃어가던 나에게, 빛과 어둠만으로도 얼마나 찬란한 세상이 펼쳐질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것은 내 생에 받은 가장 감동적인 초상화이자, 가장 통렬한 가르침이었다.
오후의 나른한 공기를 찢는 놋쇠 방울 소리. 내 아틀리에의 유일한 방문객 알림이자, 십중팔구는 길을 잘못 든 등산객이나 택배기사를 위한 소음이었다. 붓질을 멈추고 찌뿌둥한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문틈으로 하얀 지팡이가 먼저, 공간을 탐색하듯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뒤이어 나타난 것은 지팡이의 주인인 한 남자. 아, 그 남자. 동네를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앞을 못 보면서도 길을 찾는 데는 GPS라도 달린 듯 확신에 차 있던 그 걸음걸이가 오늘은 왠지 머뭇거렸다.
“저… 그림을 좀… 배울 수 있을까요?”
몹시 수줍지만, 어딘가 단단한 심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내 화실 벽은 물감을 토해내듯 강렬한 색채와 광적인 형태의 유화들로 뒤덮여 있었다. 오직 눈으로 보고, 눈으로 탐닉하고, 눈으로 평가받는 세계. 이 세계의 언어를, 눈을 감은 사람에게 어떻게 통역한단 말인가.
“인터넷에서 선생님 화실 소개를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가두는 마법사’라고….”
“푸흡!”
나도 모르게 뿜었다. 얼굴이 터질 듯 화끈거렸다. 몇 년 전, 홍보 업체에 맡겼더니 저런 오글거리는 문구를 박아놓은 것이었다. 제발 지워달라고 했더니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바람에 그냥 뒀는데, 여기서 발목을 잡힐 줄이야.
“아, 그거… 업체가 좀 과장을… 제가 마법사면 지금 로또 번호나 그리고 있겠죠. 하하.”
어색한 농담을 던지며 쩔쩔매는 내게, 그가 피식 웃으며 가방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은 고무판, 뭉툭한 송곳 같은 ‘점필’, 그리고 두꺼운 도화지였다. 그가 내민 도화지를 만져보자, 오톨도톨한 점선들이 손끝에 걸렸다. 서툴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집과 나무 스케치였다. 옆에는 꼬물꼬물한 점들로 고양이 비슷한 형체도 있었다.
“이렇게 판 위에 종이를 올리고 점필로 꾹꾹 누르면, 뒷면에 그림이 돋아나요. 손으로 세상을 만지듯, 제 그림도 만져보고 싶어서요.”
순간 머리를 둔기로 맞은 듯했다. ‘그린다’는 행위를 시각에만 가둬놓았던 나의 오만이 와르르 무너졌다. 젠장, 재밌겠는데? 호기심이 미친 듯이 동했다. 나는 그에게서 판과 점필을 빼앗듯 받아 들고는, 눈앞의 그를 ‘그리기’ 시작했다. 붓 대신 송곳을 쥐니 영 어색했지만, 십수 년간 놀려온 손의 감각이 어디 가랴. 손끝의 압력에 집중하며 그의 단단한 어깨와 부드러운 머리칼의 질감을 종이에 새겼다.
“자, 만져보세요. 선생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종이를 뒤집어, 마치 처음 만나는 미지의 대륙을 탐험하듯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돋아난 선들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이 멈칫, 하더니 이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았다. 그림과 자신을 번갈아 ‘만져보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어떠세요? 실물보다 좀 잘생기게 그려드렸습니다만.”
“…이게 저군요. 역시 전문가는 다르네요.”
그의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본 순간, 나는 이 예측 불가능한 수업이 내게도 엄청난 도전이자 선물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우리의 수업은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나는 ‘보여주는’ 대신 ‘느끼게’ 하는 법을 훈련했다. 사과를 그릴 땐 “둥글고 매끄러운 감촉, 한 손에 묵직하게 감기는 무게감, 꼭지의 까슬까슬한 저항감” 같은 온갖 감각적 언어를 총동원했다. 그는 내 목소리를 따라 점필을 움직였고, 그의 손끝에서는 곧 군침 도는 사과가 ‘열렸다’.
“선생님, 이 사과는 빨간색인가요, 초록색인가요?”
“음… 아주 잘 익어서, 한 입 베어 물면 과즙이 터질 것 같은 ‘새빨간’ 색이죠.”
“아! 그럼 점을 좀 더 촘촘하고 강하게 찍어서, 아주 진한 빨강을 표현해 봐야겠네요.”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역시 ‘색’의 추상성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보았던 몇 가지 원색들-빨강, 파랑, 노랑-을 기억의 파편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선생님, 노을은 어떤 색이죠? 빨간색하고는 다르겠지요?”
“아… 그건 말이죠… 따끈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을 때의 온기 같은 주황색이… 하루의 열기가 식어갈 때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는 느낌 같은 보라색과 서서히 섞이는… 그런 색이에요.”
“…더 어렵네요, 선생님.”
나의 현란한 비유는 그의 상상력을 안드로메다로 보낼 뿐이었다. 며칠을 끙끙 앓던 내게 불현듯 하나의 아이디어가 스쳤다. 마침 화실 구석에서 잠자던 나의 고양이 ‘누룽지’가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다 먹물 그릇을 엎지른 덕분이었다.
“아! 수묵화!”
“네? 갑자기 그건 왜…”
“선생님은 빛과 어둠은 감각으로 느끼시죠? 그렇다면 답은 수묵화입니다! 흰 종이는 빛, 검은 먹은 어둠. 먹의 농담(濃淡)으로 빛의 세기와 그림자의 깊이를 표현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색은 결국 빛의 장난이니까요!”
그의 얼굴에 ‘이 사람이 드디어 미쳤나’ 하는 표정이 스쳤다.
“그림이 온통 시꺼멓게 되는 거 아닐까요?”
“천만에!”
나는 누룽지가 엎지른 먹물 자국을 가리키며 외쳤다.
“보세요! 진한 부분은 칠흑 같은 밤, 옅게 번진 부분은 새벽의 안개 같지 않습니까? 선생님은 이제 세상의 가장 근원적인 두 가지 색, 빛과 어둠으로 그림을 그리게 될 겁니다!”
그날부터 나의 혹독한, 그러나 즐거운 훈련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에게 물 한 방울의 차이로 칠흑 같은 검정부터 안개 같은 회색까지 만들어내는 법을 가르쳤다. 그의 손가락은 점점 더 예민한 저울이 되어갔다. 실패한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갈수록, 그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빛과 어둠은 더욱 정교하고 깊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손이 먹의 농도를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 어느 날, 나는 말했다.
“자, 이제 제 모습을 그려보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붓을 들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소리와, 체취와, 공간의 기척만으로 그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의 붓이 종이를 스치는 동안, 나는 발가벗겨진 채 영혼을 스캔 당하는 듯한 신비로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붓을 내려놓았다.
“어때요? 마법사처럼 나왔나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헙 들이마셨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거기에는 사진보다 더 나를 닮은 내가 있었다. 단순히 이목구비가 비슷한 차원이 아니었다. 그림 속의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가 작업할 때의 오랜 버릇이었다. 은은한 먹으로 표현된 눈매에는 학생을 바라볼 때의 따스함이, 굳게 다문 입가에는 슬럼프에 빠진 예술가의 고집스러운 열정과 외로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그는 눈으로 본 적 없는 나의 내면을, 나의 영혼을 통째로 끄집어내 종이 위에 펼쳐놓은 것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건… 반칙인데요.”
내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내 목소리의 떨림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린 듯,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 눈에는 선생님이 늘 그렇게 보였거든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빛과, 가장 깊은 그림자를 함께 품고 있는 분으로요.”
그 순간, 아틀리에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그의 그림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흰 종이 위의 먹빛 초상화는 마치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그는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본질을 더 깊이 만지고, 느끼고,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는 자신이 만진 나의 모습을 내게 선물해주었다. 낡은 화실에 갇혀 색을 잃어가던 나에게, 빛과 어둠만으로도 얼마나 찬란한 세상이 펼쳐질 수 있는지 알려주었다. 그것은 내 생에 받은 가장 감동적인 초상화이자, 가장 통렬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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