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스토리] 케이블카
2026.03.08 14:40
1990년.
내가 이 학교로 전학을 온 해였고, 나는 고작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였다.
시험 기간이었다. 학교 뒤편에 솟아 있는 야트막한 산, 우리는 그곳을 ‘보행산’이라 불렀다. 시각장애인 흰 지팡이 보행 수업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던 곳이라 붙은, 우리끼리의 애칭 같은 이름이었다. 그날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5학년, 6학년 형들을 따라 그 산에 올랐다.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맹랑한 포부와 함께.
저녁 6시 반부터 8시까지, 기숙사 방에 갇혀 숨죽이며 자습하는 시간은 어린 내게 너무나 가혹했다. 차라리 산이 나았다. 산 중턱, 나무들이 우거진 숲 그늘 아래 놓인 벤치들은 우리들의 독서실이었다. 형들은 제법 진지했고, 나 역시 그 틈에 끼어 책을 펼쳤다. 숲의 공기를 마시며 하는 공부라니, 지금 생각해도 꽤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만 쉬었다 하자.”
6학년 형의 한마디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책을 벤치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형들은 저희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심심해진 내 눈에 들어온 건 돌계단 옆에 설치된 쇠사슬 난간이었다.
나는 그 차가운 쇠사슬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출렁거리는 그 느낌이 꼭 놀이기구 같았다.
“케이블카다, 케이블카!”
나는 신이 나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얼마 전 남산에서 타보았던 케이블카의 기억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쇠사슬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그네처럼 움직였다. 더 높이, 더 세게.
그때였다.
‘콰당!’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감각과 함께 두 발이 허공을 갈랐다. 몸이 뒤로 획 돌아가는가 싶더니, 묵직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돌바닥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별이 번쩍였다. 본능적으로 뒤통수를 감싸 쥔 손바닥 사이로 뜨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피였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형들은 사색이 되어 나를 부축했다. 우리는 쏜살같이 산을 내려왔다. 3학년 꼬맹이와 그를 챙기는 5, 6학년 형들의 급박한 발소리가 산길을 울렸다. 우리가 향한 곳은 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님실이었다.
“어머, 어머!”
사감 선생님은 내 피투성이 머리를 보고 연신 놀라셨지만, 손길만은 침착했다. 능숙하게 지혈을 하고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바통은 우리 방의 최고참인 고3 형님에게 넘어갔다.
형님은 나를 데리고 동네 외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은 상처를 보더니 꿰매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봉합 시술이었다. 더 어릴 적, 동네 친구가 던진 돌멩이에 이마가 깨졌을 때도 병원 문턱은 밟지 않았었다. 그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앞머리에 핀 하나 꽂아 대충 가리고 다녔을 뿐인데…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 긴장이 풀려서일까, 배가 고팠다. 고참 형님은 나를 근처 떡볶이집으로 데려갔다.
“짜장라면 주세요. 계란후라이 하나 얹어서요.”
형님이 사주신 짜장라면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머리에는 붕대를 붙이고 있었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짜장 소스와 고소한 후라이의 맛에 나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픔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의기양양하게, 아니 실실거리며 교문을 들어선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울먹울먹하며 발을 동동 구르시는 어머니.
“박 터진 놈.”이라며 혀를 차시면서도 눈빛은 흔들리는 아버지.
걱정스러운 표정의 남자 사감 선생님.
같은 방을 쓰는 형님들, 앞방 사는 고3 형님.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까지.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너무 황송스러운걸…’
죄송함보다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같은 초등학생임에도 피 흘리는 나를 침착하게 사감실로 뛰어주었던 형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때 묵묵히 내 손을 잡고 병원에 가주시고 짜장라면까지 사주셨던, 정말 멋있고 보고 싶은 우리 방 고참 형님.
그리고 그 밤,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그 수많은 걱정의 눈빛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참 따뜻했었어요.
내가 이 학교로 전학을 온 해였고, 나는 고작 초등학교 3학년 꼬맹이였다.
시험 기간이었다. 학교 뒤편에 솟아 있는 야트막한 산, 우리는 그곳을 ‘보행산’이라 불렀다. 시각장애인 흰 지팡이 보행 수업 때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내리던 곳이라 붙은, 우리끼리의 애칭 같은 이름이었다. 그날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5학년, 6학년 형들을 따라 그 산에 올랐다.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맹랑한 포부와 함께.
저녁 6시 반부터 8시까지, 기숙사 방에 갇혀 숨죽이며 자습하는 시간은 어린 내게 너무나 가혹했다. 차라리 산이 나았다. 산 중턱, 나무들이 우거진 숲 그늘 아래 놓인 벤치들은 우리들의 독서실이었다. 형들은 제법 진지했고, 나 역시 그 틈에 끼어 책을 펼쳤다. 숲의 공기를 마시며 하는 공부라니, 지금 생각해도 꽤 낭만적인 경험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만 쉬었다 하자.”
6학년 형의 한마디에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책을 벤치에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형들은 저희끼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심심해진 내 눈에 들어온 건 돌계단 옆에 설치된 쇠사슬 난간이었다.
나는 그 차가운 쇠사슬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출렁거리는 그 느낌이 꼭 놀이기구 같았다.
“케이블카다, 케이블카!”
나는 신이 나서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얼마 전 남산에서 타보았던 케이블카의 기억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쇠사슬이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그네처럼 움직였다. 더 높이, 더 세게.
그때였다.
‘콰당!’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감각과 함께 두 발이 허공을 갈랐다. 몸이 뒤로 획 돌아가는가 싶더니, 묵직한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돌바닥이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별이 번쩍였다. 본능적으로 뒤통수를 감싸 쥔 손바닥 사이로 뜨뜻하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피였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형들은 사색이 되어 나를 부축했다. 우리는 쏜살같이 산을 내려왔다. 3학년 꼬맹이와 그를 챙기는 5, 6학년 형들의 급박한 발소리가 산길을 울렸다. 우리가 향한 곳은 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여자 기숙사 사감 선생님실이었다.
“어머, 어머!”
사감 선생님은 내 피투성이 머리를 보고 연신 놀라셨지만, 손길만은 침착했다. 능숙하게 지혈을 하고 응급처치를 마친 뒤, 바통은 우리 방의 최고참인 고3 형님에게 넘어갔다.
형님은 나를 데리고 동네 외과로 향했다. 의사 선생님은 상처를 보더니 꿰매야 한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봉합 시술이었다. 더 어릴 적, 동네 친구가 던진 돌멩이에 이마가 깨졌을 때도 병원 문턱은 밟지 않았었다. 그저 상처가 아물 때까지 앞머리에 핀 하나 꽂아 대충 가리고 다녔을 뿐인데…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나오자 긴장이 풀려서일까, 배가 고팠다. 고참 형님은 나를 근처 떡볶이집으로 데려갔다.
“짜장라면 주세요. 계란후라이 하나 얹어서요.”
형님이 사주신 짜장라면의 맛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머리에는 붕대를 붙이고 있었지만, 입안 가득 퍼지는 짜장 소스와 고소한 후라이의 맛에 나는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픔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의기양양하게, 아니 실실거리며 교문을 들어선 순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울먹울먹하며 발을 동동 구르시는 어머니.
“박 터진 놈.”이라며 혀를 차시면서도 눈빛은 흔들리는 아버지.
걱정스러운 표정의 남자 사감 선생님.
같은 방을 쓰는 형님들, 앞방 사는 고3 형님.
그리고 누군지도 모를 수많은 사람들까지.
모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너무 황송스러운걸…’
죄송함보다는, 어린 마음에도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같은 초등학생임에도 피 흘리는 나를 침착하게 사감실로 뛰어주었던 형들.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그때 묵묵히 내 손을 잡고 병원에 가주시고 짜장라면까지 사주셨던, 정말 멋있고 보고 싶은 우리 방 고참 형님.
그리고 그 밤,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그 수많은 걱정의 눈빛들.
정말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참 따뜻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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