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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Y

[맹스토리] 빼찌꼬

2026.05.02 08:56

a11y 조회 수:5

“빼찌꼬 알아?”
“아뇨.”

기숙사에 처음 들어간 날, 방장인 고3 형이 툭 던진 질문이었다. 처음 보는 중학생 형 세 명과 까마득한 고3 형과 한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에 긴장해 있던 나는, 그게 뭐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하루하루 학교생활을 하며 나는 이 학교만의 독특한 문화를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가위바위보’를 하지 않았다. 대신 ‘빼찌꼬’를 했다.

“누가 이기나, 빼!”
“누가 이기나, 찌!”

두 사람이 동시에 “누가 이기나”를 외친 뒤, ‘빼’, ‘찌’, ‘꼬’ 중 하나를 골라 승부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가위바위보처럼 손으로 모양을 만들 필요도 없고, 서로 무엇을 냈는지 더듬어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없었다. 외치는 순간 바로 승패가 갈리니, 보이지 않는 우리에겐 이보다 더 명쾌하고 편할 수가 없었다.

사실 ‘빼’가 보자기인지, 아니면 가위인지는 모른다. 그저 ‘찌’는 ‘빼’를 이기고, ‘꼬’는 ‘찌’를 이기고, ‘빼’가 다시 ‘꼬’를 이긴다는 법칙만 중요할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풍경이다. 쪼그만 초등학교 꼬맹이들부터 시각장애인 선생님들까지 무언가 결정할 일이 생기면 냅다 입을 모아 “누가 이기나, 빼!”를 외치는 모습이라니. 살짝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정겹기 그지없다.

우리 학교에는 빼찌꼬 말고도 말로 하는 게임이 몇 가지 더 있었다. 말로 하는 야구가 있었고, 말로 하는 윷놀이가 있었다. 말축구라는 변종 게임도 하는 것을 보긴 했는데, 직접 해본 적은 없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말 윷놀이’다. 이는 가히 ‘말 게임의 예술’이라 부를 만하다. 촌스럽게 바닥에 말판을 그리거나 윷말을 챙기는 수고 따윈 필요 없다. 서로의 머릿속에 말판을 띄워두고, 상상 속의 윷말을 엎치락뒤치락 옮겨가며 노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두 사람의 입과 기억력만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치열한 승부처가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말 게임에 시동을 거는 마법의 주문은 늘 동일했다.

“누가 이기나.”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이제 빼찌꼬와도 이별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반 사회로 나가면 다들 손을 내밀어 가위바위보를 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우연히 참석한 시각장애인 모임에서 아주 익숙하고 반가운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누가 이기나, 꼬!”

하하하!

글을 쓰다 보니, 한번 아는 맹인에게 전화해서 말해보고 싶어졌다.

“밥 사주기 빼찌꼬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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