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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11Y

[초단편] 알잖아

2026.01.17 02:52

a11y Views:73

“이제 그만 만나.”
“왜?”
“알잖아.”

커다란 물음표가 머리를 스치듯 지나가더니, 무거운 철덩이처럼 가슴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래… 잘 가.”

남아 있던 숨이 가슴을 찌르듯 빠져나갔고, 그녀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텅 빈 고요만이 우웅거리며 버겁게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RRR’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렸다.
천천히 꺼내 화면을 쓸어보니 동생이었다.

“오빠! 집에 와. 아빠가 오라셔!”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아빠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실내등 불빛이 그의 머리 위로 둔하게 번졌다.

“수술하자.”
아빠가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김박이 그러는데, 망막에 칩을 넣고 특수 안경을 쓰면 너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더라.”

“그거 위험하지 않아요?”
동생이 다가와 앉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술이니 위험이 아예 없을 순 없지.”
아빠는 목소리를 조금 부드럽게 낮추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김박 말로는, 네 오빠처럼 사고로 망막에 문제가 생긴 경우라면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눈가가 살짝 떨려왔다.
두 해 전, 빛을 잃었고, 오늘, 그녀를 잃었다.
목구멍 안이 뜨겁게 울렁이는 듯 했다. 나는 마른침을 애써 삼키며 숨을 가다듬었다.

“수술할게요.”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마취제가 혈관을 타고 흐르자, 암흑보다 더 짙은 암흑이 나를 삼켰다.
의식이 가라앉는 마지막 순간, 나는 떠나던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족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안개처럼 귓가에 번졌다.
눈을 감싸고 있던 두툼한 붕대가 조심스럽게 풀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꺼풀 위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세상은 온통 뿌연 빛의 덩어리였다. 초점이 맞지 않는 렌즈처럼 모든 것이 어지러운 빛의 파편으로 흩어졌다.
실망감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누군가의 손길이 내 얼굴을 감싸더니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씌워주었다. 안경이었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파편이 제자리를 찾으며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아빠의 얼굴이었다. 깊어진 눈가의 주름,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조금 더 늙고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어느새 숙녀티가 나는 동생이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보여…?”

동생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달간의 재활 치료가 끝나고, 나는 아빠의 회사로 돌아왔다. 익숙했던 로비의 대리석 바닥이 어색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직원들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동정도, 호기심도 함께 녹아 있었다.

내 방에 들어서니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는 내가 마지막으로 쓰던 서류와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2년 넘는 시간이 통째로 증발해버린 듯했다.

천천히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한쪽에 놓인 액자를 발견했다.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액자 속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와, 그리고 그녀였다.

그녀는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날의 공기, 그녀의 웃음소리, 은은하게 풍기던 샴푸 향기까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손가락으로 차가운 유리를 천천히 쓸었다. 이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연락처는 바뀌어 있었고, 메신저를 뒤져봐도 그녀는 없었다. 집으로 찾아갔지만, 붉은 래커로 그어진 섬뜩한 X 표시만이 나를 맞이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몇 달이라는 시간이 덧없이 흘렀다. 그녀의 흔적을 찾는 일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았다. 지인들의 연락처는 모두 끊겨 있었고, 그녀가 살던 동네는 재개발의 소음으로 가득 차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래전 그녀가 스치듯 말했던 고향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낯선 도시의 이름이 박힌 팻말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리자, 오래된 가로수가 늘어선 한적한 동네가 나타났다. 나른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은 풍경 속, 시립 도서관이라는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이유 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 희미한 먼지 냄새가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높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공기 중의 먼지를 금빛 가루처럼 반짝이게 했다. 책장 넘기는 소리, 나지막한 기침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나는 천천히 서가 사이를 걸었다. 그리고, 저만치 떨어진 대출 데스크 안쪽에 앉아 있는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짧아진 머리카락,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마른 어깨.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책의 바코드를 찍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거웠다. 데스크 앞에 다다랐을 때,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장 가까운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한 권을 꺼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네, 회원카드…”

무심코 고개를 든 그녀의 목소리가 문장 끝을 맺지 못하고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동공이 놀라움으로, 혹은 당혹감으로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내 심장 소리만이 남았다.

“오랜만이야.”

내 목소리에 그녀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목소리를 뱉어냈다.

“너… 어떻게… 아니, 눈은?”
“보면 몰라? 아주 잘 보여. 너, 머리 잘랐네.”

나는 일부러 태연한 척하며 책을 데스크 위로 툭, 밀었다. 그녀의 시선이 책과 내 얼굴을 번갈아 오갔다. 그때, 옆에 있던 다른 사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속삭였다.

“선생님, 아는 분이세요? 잘생겼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동료 사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따라 나와.’

도서관 뒤편, 낡은 벤치가 덩그러니 놓인 작은 공터. 우리는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섰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그녀였다.

“다행이다, 정말.”

진심으로 안도하는 그녀의 표정에 가슴 한쪽이 아릿했다. 나는 준비해온 비장한 대사를 꺼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 찾았어. 몇 달을 헤맸는지 몰라.”
“나를? 왜?”

그녀의 순진한 물음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왜냐니. 할 말이 있으니까. 우리 이렇게 끝낼 수는 없잖아.”
“…뭐? 우리, 끝났었어?”

그녀의 눈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커졌다. 이번에는 놀라움이 아니라 순도 100%의 황당함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쳤다.

“이제 와서 시치미 뗄 생각 마. 네가 그랬잖아. ‘이제 그만 만나.’ 라고.”
“응, 그랬지.”
“‘왜?’냐고 물으니까 ‘알잖아.’ 라며 돌아섰고!”
“응, 그랬지.”

너무나도 태연한 그녀의 긍정에 오히려 내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너 진짜… 아직도 모르고 있었구나!”
“뭘 몰라?”

“그때 나, 사서 공무원 시험 마지막 스퍼트 올리고 있었잖아. 너한테 맨날 말했지? 한 달만, 딱 한 달만 우리 서로 없는 사람처럼 살자고. 도서관에 처박혀서 공부만 할 거라고. 너도 알겠다고 했잖아!”

“…어?”

커다란 물음표가 다시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덩이처럼 가라앉는 대신, 헬륨 풍선처럼 둥실 떠올랐다.

“‘이제 그만 만나’는, 시험 끝날 때까지만 그만 만나자는 거였고!”
“어….”

“이 바보야! 그 중요한 시기에 너 보면 공부가 되겠냐고! 그날도 너 얼굴 보고 겨우 마음 다잡고 돌아서는데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녀는 허리에 손을 척 올리고 나를 쏘아붙였다.

“그래서, 시험 합격하고 너 찾아갔더니 아저씨가 너 미국 갔다고 하더라. 눈 수술 때문에 아주 오래 걸릴 거라고. 그래서 기다렸지.”

나는 주저앉고 싶은 심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 그럼 나는… 그동안 대체 뭘 한 거지…”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게 다가와 까치발을 들고 헝클어진 내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은은한 샴푸 향기가 훅 끼쳐왔다.

“뭘 하긴. 삽질했지. 아주 장대한 삽질.”

그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다시 찾아와줘서 고마워. 삽질남씨.”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여전히 조금은 핼쑥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나는 정말이지… 행복했다.

“저기… 그럼 우리, 정말 안 헤어진 거… 맞지?”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도서관 데스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일단 거기 가서 대출증부터 만들고 얘기해. 연체는 안 봐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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